[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85] 고마운 사람들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85] 고마운 사람들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08.16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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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이민에서 만난 사람들
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되돌아보면 참으로 무모한 짓이었다.
불혹이라는 40도 넘은 나이에 아무 준비도 없이 뉴질랜드로 이민을 결행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혼자의 몸이 아니고 고만고만한 어린 자녀 넷과 연로하신 어머님까지 모시고 일가친척도 없는 낯선 외국 땅으로 이민 간 것은 무슨 이유를 대든지 무모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민이라는 걸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그에 대한 준비도 사전에 했을 리가 없고 더구나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남태평양에 위치한 조그만 섬나라라는 것밖엔 아는 게 없었으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히 어울리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무모한 도전으로 막막하고 두려웠던 이민 생활을 10년도 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낯선 곳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었다.

준비 없이 시작한 뉴질랜드 생활은 사회에 적응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당연히 가지고 간 돈을 까먹어 가면서 수업료를 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이민 간 이민 선배들이 한 2년간은 ‘꼴락꼴락’하면서 지내야 한다고 하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당분간은 골프, 낚시, 골프, 낚시하면서 천천히 뉴질랜드 사회를 알아보고 할 일을 찾으라는 권고였다. 

그래서 골프채도 사고 낚싯대도 장만하여 이민 선배들 따라다니며 ‘꼴락꼴락’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가지고 간 퇴직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속도가 생각보다 많이 빨라 1년도 채우기 전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으리란 패기 하나만으로는 현실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낯선 환경에서 영어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나는 가족을 데리고 이민 온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한국에서의 경력과 학력은 이민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현지 상황과는 괴리감이 있어 모두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뉴질랜드에서 원하는 자격도 갖춰야 하고 영국식 발음이 강한 뉴질랜드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한 적응도 필요했다.

현지 회사에 취업하거나 이민자들이 선호하는 한국 교민들 대상으로 창업하거나 아니면 기존 사업체를 인수하는 등 여러 선택을 놓고 고민하다가 현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은 자격도 갖추어야 하고 언어 문제도 있어서 포기하고 창업보다는 좀 더 위험 부담이 덜한 기존 사업체를 인수하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여러 곳을 찾아다녀 보았지만, 각기 장단점이 있어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와 상의했더니 성인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을 가르쳐 취업할 수 있도록 돕는 사립 전문학교를 운영하는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체구가 커서 첫인상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따뜻한 미소를 지닌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B는 내 경력과 학력이 적힌 이력서를 보더니 경험도 없이 사업을 하기보다는 자기 학교에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처리하고 공부하는 동안 생활비도 대주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따게 되면 내가 원할 경우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좋은데 꼭 의무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했다. 

생활비까지 받아 가며 무료로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공부도 할 수 있고 자격증을 딴 후에는 취업까지 보장되니 망설이거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뉴질랜드로 무작정 이민 가서 막막하기만 했던 미래에 가느다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B는 뉴질랜드라는 낯선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B 덕분에 나는 가족을 부양하면서 키위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었고 공부를 마친 후 그곳에서 키위(뉴질랜드인들을 일컫는 명칭)들을 가르치면서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급여를 받아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해준 것 뿐만 아니라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의 이민 생활을 견딜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기에 뉴질랜드 생활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고마운 사람이다.

B가 물질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면 이민 초기에 낯선 땅에서 살면서 가졌던 외롭고 두려웠던 심정에 큰 위안과 감동을 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이민 초기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기만 했던 하루하루를 보낼 때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밤새 가린 커튼을 열고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다가 눈이 번쩍 띄었다. 

집 정원 가득 형형색색의 색종이로 만든 하트 모양의 꽃들이 잔뜩 피어있었다. 누군가가 우리 가족을 위해 색종이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나무 막대기에 달아서 우리가 잠든 새벽에 몰래 와서 정원 가득 꽂아 놓은 것이다. 

아침 햇살을 받은 다양한 색깔의 하트 모양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거리고 있는 모습은 눈물이 날 만큼 너무 아름다웠다. 

제법 넓었던 정원을 가득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하트를 만들었을 것이고,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우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새벽에 와서 일일이 그 넓은 정원 가득히 수놓고 갔을 그 정성과 마음 씀씀이 정말 고마워서 울컥해졌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가 그런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일로 우리 가족은 누군가가 우리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큰 위안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지금도 아침 햇살을 받으며 반짝거리던 형형색색의 수많은 하트 꽃을 생각하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날의 감동과 위안 그리고 고마움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준비가 돼야만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손 내밀기를 미룬다.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무재칠시(無財七施) 즉, 안시(眼施), 화안시(和顔施), 언시(言施), 신시(身施), 심시(心施), 좌시(座施), 찰시(察施)와 같이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게 일곱 가지나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물질적인 도움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기꺼이 무엇이든 베풀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 

낯선 이방인을 볼 때마다 미소지으며 눈인사를 해주던 이름도 모르는 이웃 키위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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