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79] 고향(故鄕) 생각
[한상익 컨설턴트의 소소한 일상이야기79] 고향(故鄕) 생각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07.05 0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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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익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

나에겐 딱히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본적이 서울 종로구 봉익동이고 태어나서 자란 곳도 서울 중구 황학동이었으니 명실상부한 서울 토박이이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고향이라는 정의에 따르면 서울을 고향이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고향에 대한 향토적이면서도 어머니의 품과 같이 푸근한 이미지와 고향(故鄕)이란 단어에서 오는 어감 상의 영향으로 이젠 가히 세계적인 도시가 된 서울을 고향으로 부르기엔 주저함이 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서도 한곳에 진드근히 머물러 살지 못하고 여러 곳을 옮기며 살았기 때문에 딱히 고향으로 여길 만큼 정이 가는 곳도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졸업하여 결혼할 때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아이들이 하나둘 태어나면서 경기도 의왕으로 그리고 안산까지 내려가 살았다. 안산은 아침 일찍 서두르면 서울 직장까지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거리상으로 이사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남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학군을 따라 이사한다고도 하지만, 내 경우에는 어머니도 모셔야 하고 늘어나는 아이들과 함께 좀 더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더 큰 평수의 아파트를 얻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그리고 정해진 예산으로 찾다 보니 점점 더 서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산에서 살다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생활은 안산살이가 마지막이 되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을 넘어 뉴질랜드에서 살다 보면 뉴질랜드가 제2의 고향이 될 법도 하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도 한곳에서 계속 산 것이 아니라 오클랜드 중심에서 살다가 약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해밀턴으로 내려갔고 다시 오클랜드 서쪽 지방으로 옮겨 와 살았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서도 딱 집어 고향이라고 생각할 만한 곳이 없다.

반면에 충주에서 태어나 자란 어머니는 20대 초반에 서울로 시집와서 서울에서 더 오래 사셨지만, 마음속에는 어릴 때 추억이 있는 충주가 영원한 고향이셨다.

뉴질랜드에서 사시는 동안에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실 마음을 늘 품고 계셨던 것 같다.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어머님의 귀소본능은 더 깊어지셨고 그 목적지는 분명하셨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고향인 충주로 가시고 싶어 하셨다.

어머님의 고향 충주에는 어릴 적 추억뿐만 아니라 유일한 친정 식구인 남동생네 가족과 여동생네 가족이 살고 있어서 더욱 그리워하셨던 것 같다. 

내 기억에도 어렸을 때 외삼촌 집에 놀러 가서 지냈던 추억의 조각들이 어렴풋하게 나기도 하고, 오래된 앨범에는 내가 초등학교 다녔을 때 대학교 다니던 외사촌 형과 찍은 사진과 이모부 내외가 찍힌 빛바랜 사진이 멈춰버린 내 기억을 붙들고 있다.

어머니는 6.25 참전 용사였던 남동생이 전쟁 후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충주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짓게 도움을 주시고 추수한 후 쌀로 갚게 하셨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아마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이었을 것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외삼촌이 소달구지에 쌀가마를 잔뜩 싣고 충주에서 서울까지 소달구지를 끌고 오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교통이 복잡하지 않았고 교통편도 여의찮았기 때문에 소달구지를 몰고 오셨겠지만, 충주에서 서울까지 소달구지를 끌고 오는 길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이른 새벽에 출발하지 않았다면 도중에 숙박도 해가며 오셨을 것이다. 

나는 우리 집 앞에 서 있던 소달구지를 동네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것에 우쭐해하던 생각이 난다. 비유하자면 자동차가 귀했던 시절에 집 앞에 자동차를 주차해 놓은 것을 이웃들이 신기함과 부러움으로 쳐다보는 것에 자랑하고 우쭐대고 싶은 심정과 같을 것이다. 매년 쌀 배달 겸 서울 나들이를 하시다가 나중에는 쌀을 팔아 돈으로 가져오시기도 했다.

외삼촌 집과의 교류는 내가 결혼 후에도 계속 이어졌었다. 한번은 어머님을 모시고 충주 집으로 가는 길에 교통순경에게 걸린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당시에는 외진 길에 교통순경이 숨어 있다가 한적한 길에서 조금이라도 속도를 내면 갑자기 나타나 과속이라고 하면서 면허증을 달라고 한다. 

그러면 눈치 빠른 운전자는 5천 원짜리를 면허증 밑에 넣어 주면 교통순경은 돈을 챙기고 조심하라는 말을 하며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단속에 걸렸을 때 뒷좌석에 앉아 계셨던 어머님이 앞으로 머리를 내밀며 “신재천이 아슈?” (신재천은 충주 사시던 어머님 동생 이름이다) 하면서 지연(地緣)과 혈연(血緣)으로 무마해 보려고 시도하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통하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해주고 끝냈지만, 어머님은 그 정도로 고향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알고 봐줄 거라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다. 

어머님의 고향 방문도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뜸해지게 되었고,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에 이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어머님은 뉴질랜드로 우리와 함께 이민 가신 후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향을 향한 향수병이 점점 깊어지셔서 어쩔 수 없이 말년에는 한국에 돌아오셔서 한국에서 임종을 맞이하셨지만, 결국 다시 고향 땅을 밟으시진 못하셨다.

어머님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셨던 고향길을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이미 90대 중반을 넘기신 외삼촌의 궂긴 소식도 있었고, 마침 교회 일로 충주에 갈 일이 생겨 겸사겸사 들려 아직 생존해 계신 외숙모도 만나고 외사촌 형님 내외 그리고 누님도 만나 볼 수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젠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됐지만, 세월로 가려진 얼굴에서도 옛 기억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 나를 귀여워하고 이뻐해 주었던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다시 느낄 수가 있었고 잊고 살았던 기억을 소환해 주어서 고향이란 이런 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변하고 없어져서 내겐 고향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렴풋하게나마 아련하고 그리운 기억과 추억이 남아 있는 곳도 고향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고향은 어쩌면 그리운 마음속에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한상익(myhappylifeplan@gmail.com)
•푸른소나무 life plan consulting 대표
•수필가
•재취업지원 컨설턴트
•한국생애설계사(CLP)/생애설계 전문강사 
•뉴질랜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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