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훈의 세상사는 이야기] 멍청한 질문과 현명한 대답
[최승훈의 세상사는 이야기] 멍청한 질문과 현명한 대답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2.08.18 0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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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최근 국회의 대정부 질문을 보면서 많이 웃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임을 자부하는 선량이라는 사람 들이다. 그런 그들이 하는 질문은 한심하고 가소롭기 그지없게 느껴졌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제대로 된 학습 없이 터트리고 보자는 심산으로 하는 질문은 지켜보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명한 대답을 원한다면 합리적인 질문을 하라”라는 괴테의 명언처럼 질문은 지식과 지혜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의 가려움을 긁어주는 청량제가 될 수도 있다. 

이모(李某) 교수를 이모(姨母) 교수로 한국 3M을‘한00(3M)’이라는 작명까지 하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한편으로 분명하고 합리적인 대답을 하는 국무위원이 돋보이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려면 반드시 질문하는 학습과 훈련을 하여야 한다.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이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라고 알고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프로나오스(앞 마당)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 한다.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즐겨 인용했기 때문에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곧 ‘소크라테스’를 연상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라. 그래야만 너는 비로소 참된 지혜를 찾아 나서는 출발점에 설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자신은 정작 아무것도 모르면서 뭔가 아는 척하는 동안은 자신의 그 거짓된 지식이나 쥐꼬리(?) 만한 단편적인 지식에 만족해서 참된 지혜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셈인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거짓된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보다 열 배, 백배 훨씬 더 낫다."고 해석할 수 있다. 

‘소크라데스’가 들려준 말 중에 우리가 크게 새겨야 할 말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인간이 지닌 최고의 탁월함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질문능력”이라고 했다. 그만큼 질문은 위대하고 위력(威力)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질문을 터부시(taboo 視)하거나 집단생활의 걸림돌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유능한 지도자가 되려면 질문능력이 있어야 한다. 유능한 교수, 유능한 검사, 유능한 경찰, 유능한 기자, 유능한 정치인, 등등 유능 인이 되려면 질문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아니 모든 분야에서 생활이나 일상에서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삶의 질이 훨씬 높은 것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변화무쌍한 시대를 지혜롭고 올바르게 살려면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미나 활동 등에서 질문을 하라고 하면 묵묵부답인 경우가 더 많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절실한 과제가 있는 직장인이 미래에 대해 두려움과 걱정으로 날을 지새우는 일이 잦다고 하면서도 세상 물정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고민만 한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속담에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익숙한 일이라도 남에게 물어보고 조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사안일 현실 안주 등 방심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나는 어떤 분야에 자신이 있고, 경력도 있어서 실수할만한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실수가 나오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비슷한 속담 중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 라는 속담도 있다. 

각박한 사회를 살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설령 아는 것이 있어도 물어보는 습관을 통해 미래를 개척해야 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사기와 술수로 주머니를 노리는 하이에나가 득시글거린다. 이때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혼자 결정하다가 알토란 같은 재산을 한순간에 날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고 했는데 모르는 것도 묻지 않으면 사기를 당하거나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배우려고 하는데 배우려면 바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거나 모르면서 묻지 않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는 척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르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선뜻선뜻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모르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일까?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싫은 것이다.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질문도 좋은 대답도 할 수 없다. 지혜로운 리더나 부모는 지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류의 발전을 돌이켜보면 질문 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모든 발명이나 발견 혹은 이론들이 질문이 사고를 자극한 결과물이었다. "새처럼 날 수는 없을까?", "왜 사는가?", "좀 더 편하게 살 수는 없을까?", "고객에게 물건을 더 잘  팔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이 없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수많은 창조물 들이 우리 주위에 가득하다. 

우리는 좀 더 신선하고 독창적인 사고로 행동하기 위해, 매일 마주하는 상황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혹은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질문을 해야 한다. 

"전구를 발명한 사람은?" "토마스 에디슨". 이런 질문과 대답은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다. 또는 에디슨이 엉뚱한 질문으로 선생님을 난처하게 한 후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일화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1,200번의 실패를 했다는 것과 그 실패 속에서 "어째서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일까? 어떤 가설과 실험이 잘못되었을까?"하는 1,200여 번의 질문과 사고(思考)를 거듭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거나 간과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반드시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왜 질문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언제" 질문을 해야 할까? 상대가 정부 관료인가? 이웃 어른인가, 직장의 상사인가, 직장동료나 후배인가? 가사 일에 무관심한 남편인가, 사춘기의 아이인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단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인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인지, 자신의 의견과 같아지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인지에 따라 질문의 방법과 내용은 달라져야 한다. 

인생, 성공, 노후, 행복은 질문에 의해 결정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지금, 무엇을, 어떻게 묻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사실 잊지 말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많이 하기 위한 “학습과 훈련”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이모(李某) 씨를 이모(姨母)라 하지 않게 되고 ‘한국3M’을 ‘한00’이라 하지 않게 될 것이며,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고 하는 멍청한 망언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최승훈
•한국생애설계포럼 대표
•한국생애설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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