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길 CEO칼럼] 질레트(Gillett), 쉬크(Schick) 면도기_수염(鬚髥)과의 전투(戰鬪)
 [전대길 CEO칼럼] 질레트(Gillett), 쉬크(Schick) 면도기_수염(鬚髥)과의 전투(戰鬪)
  • 김민수 기자
  • 승인 2023.11.29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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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미국 사업가 ‘킹 캠프 질레트(King Camp Gillett/1855~1932)’가 면도기(面刀器)를 발명했다. 1895년 어느 날, 그는 당시 트렌드였던 잘 다듬어진 수염을 면도 중이었다. 

그날따라 수염이 잘 깎이지 않았다. 무뎌진 면도날을 다시 숫돌로 갈아야만 했다. 그때 그는 ‘면도날만 교체해서 계속해서 사용하는 교체식 면도기’를 생각했다. 

그렇게 6년을 보낸 1901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출신 화학공학자 ‘William Emery Nickerson’을 우연히 만나서 그의 도움으로 일회용 면도날을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

이들이 발명한 면도기는 T자 모양의 홀더(Holder) 윗부분에 양날이 얇고 날카로운 면도날을 끼웠다. 그 위를 빗처럼 홈이 있는 부속으로 덮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홈 덕분에 면도날이 피부에 주는 자극이 약해지며 안전성을 높였다. 면도날이 무뎌지면 새로운 날로 교체해서 계속 쓸 수 있게끔 디자인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군사 규정 때문에 모든 군인은 개인 면도기 세트를 소지해야만 했다. 이때 질레트는 미 육군이나 해군 휘장이 새겨진 케이스(Case)의 면도기 세트를 개발했다. 

1917년 한해에 약 1,100,000개의 일회용 면도기를 판매했다. 1918년에는 미군 전 장병에게 질레트 면도기 세트를 보급했다. 1918년, Gillette 면도기 3,500,000개, 면도날 32,000,000개를 판매했다. 이 당시 수많은 기업이 전쟁 때문에 망했으나 질레트는 오히려 전쟁특수를 누렸다. 

전쟁 후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전쟁 동안 스스로 면도하는 일에 익숙해진 미군 병사들이 계속해서 질레트 면도기를 구매했다. 전쟁 후에도 질레트 면도기는 계속해서 남성들의 애용품(愛用品)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 최초로 면도기를 개발, 상용화한 ‘킹 캠프 질레트’는 로열티(Royalty)와 배당금으로 대부호(大富豪)가 되었다. 

그런데 남자는 매일 아침 왜 면도를 해야만 하는가? 
인체에서 머리카락과 남자의 수염은 계속해서 자라난다. 이 때문에 남자에게 수염은 꽤 성가신 존재다. 사냥할 때도 방해가 되고 벌레들이 기생하기도 하는 등 방치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면도(面刀)는 미관을 위해서가 아닌 기능적 필요로 시작되었다. 인간이 제모(除毛)와 면도(面刀)를 했다는 유물이 남아 있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는 조개껍데기, 상어 이빨, 돌조각 등 갖가지 재료 등으로 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의 예리함은 보잘것없어서 수염을 깔끔하게 깎아낼 수가 없었다. 수염은 같은 굵기의 구리철사와 비슷한 강도를 지녀서 이런 도구로 그저 너무 긴 털을 짧게 자르는 정도였다. 

수메르인 두상(頭像)
수메르인 두상(頭像)

고대 Tigris 江과 Euphrates 江 유역에서 번성한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 발생의 주역인 BC 3세기경 ‘수메르(Sumer)인’은 이런 방식의 불완전한 면도를 싫어했다. 

위생이나 기능상의 필요 외에도 미용을 위해 깔끔한 얼굴을 원했다. 하지만 그 당시 깔끔한 면도를 할 만큼 정교한 칼날 제작이 불가능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털을 자르지 못한다면 뽑는다!’라는 생각을 한 수메르인 들은 족집게를 개발해서 수염과 체모(體毛)를 뽑았다. 수염을 한 가닥씩 뽑아내는 데 엄청난 시간, 노력과 고통이 뒤따랐다. 고대에도 미용을 위해서는 고통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수메르인의 유적에서 수많은 족집게가 발굴되었다.

Rome인은 머리털과 눈썹을 제외한 모든 체모(體毛)를 혐오해서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을 천시(賤視)하고 경멸(輕蔑)했다. 깨끗하게 깎은 수염은 신분 상승의 표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변변한 거울과 예리한 칼날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스스로 수염을 깎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로마인의 깔끔한 턱은 노예를 가졌으며 정기적으로 이발사에게 돈을 지불할 자금력이 있다는 징표(徵標)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나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겨도 면도 크림과 비누가 없던 시절에 얼굴 이곳저곳을 칼에 베이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고도의 면도 기술을 보유한 이발사는 장인(匠人)으로 여겨져 후한 대우를 받았다. 

피 내지 않고 면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면도할 때 베인 상처 치료용 연고를 만드는 기술이 로마 시대에 개발되었다. 이발사들은 상처 치료로부터 시작해서 의학 기술을 체득(體得)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이발사 중에는 의사를 겸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발사의 의사 겸직은 이후 중세 시대 의학에 대한 탄압과 맞물려 이발사들이 의사의 역할을 대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중목욕탕 문화가 번성했던 로마에서는 수염 외의 다른 체모를 제거하는 것도 유행이었다. 무딘 칼날로 음모(陰毛) 등을 제모(除毛)하기가 무리가 따랐으며 수메르인처럼 족집게로 뽑아내곤 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희곡(戲曲)에는 목욕탕에서 대화를 나누며 상대방의 음모를 서로 뽑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로마의 철학자, 웅변가인 세네카(Seneca/BC4~655)는 자신의 책 속에서 ‘공중목욕탕에서 체모를 뽑느라 울려 퍼지는 신음 소리가 시끄럽다’라고 썼다.    

로마제국 5대 황제(皇帝) 네로(Nero/AD37~68) 
로마제국 5대 황제(皇帝) 네로(Nero/AD37~68) 

로마 시민과 로마 황제도 면도(面刀), 제모(除毛)의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주기적으로 견뎌야 하는 고통 때문에 로마제국 네로(Nero/AD37~68) 제5대 황제(皇帝)는 면도하기를 포기(抛棄)하고 수염을 길렀다. 사람들은 품위가 없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면도의 고통을 피하려고 수염을 계속 길렀다. 

그 후에도 로마 황제들은 점차 면도하는 것을 기피했다. 결국 모든 로마인이 면도를 포기하고 수염을 기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기(西紀) 1세기 이후 로마 황제의 동상(銅像)에는 수염이 묘사된 이유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도 면도는 계속되었다. 

수염을 기르는 것이 유행이 된 순간도 있었지만, 이는 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산신령처럼 자연스럽게 기르는 것이 아닌 깔끔하게 관리된 수염을 위해서 면도는 필요했다. 

남성들은 자신의 수염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의 볼 주위를 면도했고 여성들은 피부의 깨끗함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과 팔다리의 잔털뿐 아니라 눈썹까지 밀어버렸다. 이것은 면도하지 않던 아랍인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이슬람 측 보급선이 프랑크 측 군함에 발각될 것을 대비해 이슬람 측 선원들을 모두 면도시켰더니 아군으로 착각해서 돌려보냈다는 비화도 있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칼날은 점차 예리(銳利)해졌다. 

로마 시대에는 여성(女性)도 남성(男性)처럼 이발소에서 면도했다. 이발사(理髮師)를 뜻하는 영어 ‘바버(Barber)’는 라틴어 ‘바르바(Barba)’에서 왔으며 ‘수염(鬚髥)’을 말한다. 

현대의 이발소는 주로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일만 하지만 중세의 이발소는 제모와 면도가 주된 업무였다. 중세 이후에도 이발사들이 의료 행위를 해왔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몇 세기가 지나도 면도에는 유혈(流血) 사태가 뒤따랐으며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털과의 투쟁>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1762년이 되어서야 안전한 면도를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프랑스의 장인이었던 ‘자크 페레’가 안전면도기의 초석이 될 보호막을 개발한 것이다. 면도하는 동안 피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칼날 주변에 나무 슬리브를 부착한 단순한 장치를 개발했다. 

면도의 역사에서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는 1769년에 <<혼자서 면도하는 법(Pogonotomie, au L’Art D’Apprende a se Raser Sol-Meme)>>을 펴냈다. 자신의 발명품과 함께 개인이 스스로 면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물론 이발사들은 밥통을 빼앗기는 것에 반발해서 그를 비난했으나 사람들은 솜씨 좋은 이발사에게 의존하기보다 성능 좋은 면도기를 선택했다. 

면도기 개발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발전했다. 1880년 독일인 ‘캄페 형제’가 발명한 ‘스타(Star) 면도기’가 출시되었다. 그전까지의 면도기는 수직의 칼날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새 면도기는 괭이를 닮아서 ‘괭이형 면도기’라고 불렀다. 

칼날이 쉽게 무뎌지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톱니 모양의 칼날을 도입, 더욱더 안전한 면도가 가능해졌다. 면도 솜씨보다는 면도기의 성능을 통해 안전한 면도가 확실하게 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했으며 면도기 개발자들은 일제히 특허를 출원했다. 1880~1901년, 미국에서는 80여 종류의 안전면도기 특허가 출원되었다.

면도기의 대명사인 질레트(Gillette) 회사의 창업자인 질레트는 스타 면도기의 팬이었다. 당시 스타 면도기는 매우 비쌌지만, 점차 칼날이 무뎌져 자꾸 베이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질레트는 자신이 애용하던 스타 면도기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칼날을 갈아서 재사용하던 기존의 방식은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뭇사람들은 상처를 감수하며 오래도록 면도기를 사용하길 원했다. 본인은 물론 주변인들의 불편함을 보고 질레트는 “손잡이 말고 칼날만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세계 면도기 시장의 점유율 70%가 넘는 대기업의 탄생은 이렇게 단순한 발상의 전환에서 이루어졌다. 면도날이 닳으면 교체할 수 있는 탈착형 면도기로 질레트는 큰돈을 벌었다. 전 세계의 남자들도 면도하면서 유혈 사태를 줄일 수 있었다. 

단순히 면도의 고통을 줄일 뿐만 아니라 주기적인 칼날 교체로 파상풍이나 면도 독의 위험을 줄여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남성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제이콥 쉬크(Jacob Schick) 전기면도기(광고)  
제이콥 쉬크(Jacob Schick) 전기면도기(광고)  

은퇴한 미 육군 대령 ‘제이콥 쉬크(Jacob Schick)’도 면도할 때 유혈 사태 방지에 큰 공헌을 했다. 그가 알래스카에 배속되었을 때 물이 얼어붙어서 수염을 깎을 수 없었다. 그는 물 없이도 면도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1929년에 전기면도기(電氣面刀器)를 세계 최초로 발명해서 특허를 출원했다. 

1931년부터 시판된 전기면도기는 물이나 크림 없이도 면도할 수 있었다. 열심히 면도해도 잔털이 조금 남는다는 단점은 있지만 면도기 구조상 얼굴을 베이지 않기 때문에 남성들로부터 열렬히 사랑받는다.

지금도 아침에 면도하다가 얼굴을 베이는 남자들이 있다. 이럴 적에 거울도 없이 무딘 칼로 면도를 하다 살짝 베이는 것을 넘어 살가죽이 벗겨지는 중상을 입었던 고대인들과 수염을 하나씩 뽑아 제거했던 수메르인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저절로 너털웃음이 나올 것이다. 

지금도 면도는 100%의 안전성을 보장하지 못하지만, 남성들은 고통을 덜 느끼고 출근 준비를 한다. 기원전부터 남자들의 피와 눈물이 담긴 <수염과의 전투>는 오늘 아침에도 계속되고 있다. 

조물주는 무슨 연유로 남성에게만 수염(鬚髥)과 구레나룻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도록 인간을 만들었을까? 

오늘 아침에도 거울 앞에서 면도하며 로마 시대 네로 황제를 생각한다. 끝으로 질레트(Gillett), 쉬크(Schick)란 상표가 면도기(面刀器)를 발명한 사람 이름임을 이제야 알았다.  

참고로 국산 면도기 회사인 도르코(DORCO)는 전신인 동양경금속(주)의 앞 글자 'DO'와 면도기(Razor)의 'R', 회사(Company)의 'CO'를 따서 만든 상표라고 한다.

      전   대   길
(주)동양EMS 대표이사,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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